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한국 요리 (문단 편집) === 한식의 후식/음료 === [include(틀:상세 내용, 문서명=한국의 전통음료)] 본래 한식의 곁들이는 후식/음료는 퍽 다양했으나, 굉장히 다양한 종류에 오랫동안 발전해온 유럽/아메리카/중동/남아시아의 후식에 비해서는 빈약한 편이다. 이유는 여럿 있겠지만 후식은 평소에는 그냥 간단하게 과일 정도로 때웠고 명절·잔치를 빼고는 중요하지 않게 생각했던 탓인 듯. 사실 현재의 한국 음식은 음식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달고 풍미가 강한 음식이 많아서[* 닭갈비라던지. 삼겹살이라던지, 중화요리지만 사실상 한국음식인 짜장면도 기름맛과 단맛이 강하다.] 단 후식을 먹는다면 솔직히 부담스러워지는 경우도 있다.[* 오히려 메인요리를 다 먹고 나면 풍미가 강하고 단 맛이 나는 부산물이 많이 남는 요리들이 있다면 그 부산물에 밥을 볶거나 비벼 먹는 경우가 있는데 오히려 이것을 ''후식''이라고 부른다] 종류로는 [[한과]], [[약과]], 쌀과자, [[꿀떡]], [[강정]] 등이 있으며 [[수정과]], [[식혜]], [[오미자]], [[매실차]] 같은 달콤한 음료수도 있다. 하지만 한국에서는 조선 후기까지도 [[설탕]]이 매우 귀했기 때문에[* 일본의 경우 가고시마 아마미 군도에서 사탕수수를 재배했기 때문에 비교적 설탕의 자체수급이 가능했지만, 한국은 위도상 사탕수수가 자랄 수 없었기 때문에 해방 직후에도 대부분의 지역에서 설탕은 귀한 재료였다.] 한과는 대체로 양과자나 화과자[* 씁쓸하고 다소 텁텁한 일본식 차인 말차와 곁들이는 용도로 먹었기 때문에 씁쓸함과 텁텁함을 씻어내기 위해 매우 단 편이었다. 애초 당시 화과자는 비싼 식재료인 설탕을 듬뿍 사용했기 때문에 다도문화를 즐기는 상류층 전용이었다.]에 비해 담백한 편이다. [[초콜릿]]이 처음 조선에 들어왔을 때 달콤한 맛에 반해 '우리는 언제 이런 과자를 만들 것인가!' 하고 한탄하는 이야기가 [[조선일보]]에 실린 적도 있다. 사실 의외로 꿀이나 엿이라든지 당밀에 절이거나 졸여낸 정과와 같이 달달한 후식도 충분히 있긴 한데, 고려 시기 까지는 불교의 차문화로 인해 달콤한 후식들이 상당히 있었던 것으로 전해지나 조선 건국 이후 차문화가 쇠퇴하고[* 조선시대에도 꾸준히 차를 섭식하였으나, 일본의 [[다도]]처럼 예식화된 문화 대신 손님 접대나 개인 기호식품 용도로 간소화되었다.], 이러한 차와 곁들여 먹는 달콤한 간식을 사치스러운 것으로 간주하는 풍조가 퍼지면서[* 당연하지만 설탕이 없었던 것이 제일 크다. 꿀은 채취하기도 어렵고, 조청이나 떡, 과자도 곡식으로 만들기 때문에 결국은 주식과 경쟁하는 관계에 있을 수 밖에 없었다. 거기다 바삭함을 위해 기름에 튀겨내기도 했는데, 참기름과 같은 고가의 식물성 기름으로 했기 때문에 백성들이 꿀과 곡식, 기름의 공납에 시달렸고 고려시대 조정에서 유밀과 금지령을 내린 적도 있다.][* 추가적으로 고려 시대에 활발했던 교역 덕분에 이런 문화가 발달할 수 있었다고 보기도 한다. 또한 팔관회 등 국가에서 종교행사를 주최하면서 이러한 과자류를 고임으로 올려두는(현대의 칠순잔치 등에서 그러하듯) 풍조가 유행했다고도 한다. 즉 재료의 수급도 비교적 쉬웠고 소비도 많았다는 것.] 몇몇 후식류는 이름만 전해지고 있으며, 지금까지도 유명한 유밀과, 다식, 정과 등의 한식의 후식들은 삼국시대~고려시대 즉 불교가 융성하던 시대에 등장한 것이 많다. 특히 유밀과는 고려시대에 중국에서 고려병이라는 이름으로 퍼져나가기도 했다. 다만 설탕의 수입이 원활해지고 양과자들이 유입된 시점에서는 확실히 단맛에서 밀렸던 것은 사실이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